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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은 단순한 마약 영화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중독자의 일상을 넘어, 청춘이라는 시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90년대 영국 사회의 잔인한 단면을 배경으로, 기성세대의 기대와 구조적 한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본문에서는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청춘의 민낯, ‘선택’이라는 자유의 양면성, 그리고 결국 마주하게 되는 냉혹한 현실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청춘의 끝자락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닌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는 치열한 자아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트레인스포팅: 청춘의 초상
트레인스포팅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이질적’이고 ‘불편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 불쾌함은 마약이라는 소재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 그려진 청춘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무기력함과 불안, 그리고 방향성을 잃은 초상이기 때문이다.
렌튼과 그의 친구들은 명확한 목표가 없다. 그들은 내일을 계획하지 않고, 오늘의 쾌락에만 매달린다. 어딘가 열등하고 불안한 청춘의 그림자처럼, 그들의 삶은 피로하고 무질서하다. 그들은 도덕과 체제,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정상’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친다. 그들에게 있어 ‘삶을 선택한다’는 건 어떤 책임이나 방향을 수용하는 것인데, 그 무게가 너무 두렵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청춘은, 우리가 바라는 반짝이는 젊음이 아니라,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현실적 초상이다.
주인공 렌튼은 자신의 삶을 여러 번 회피하려 한다. 마약에 빠지는 건 단순한 쾌락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과 마주하는 고통을 무디게 만들기 위함이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기준, 친구와의 관계에서 오는 혼란은 그를 점점 무기력하게 만든다. 마약에 손을 대는 장면은 단순히 자극적인 묘사가 아니라, 그의 내면이 얼마나 허물어졌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욕조 속에서 서서히 침잠해 들어가는 장면은 마치 자궁으로 돌아가는 듯한 회귀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 하지만 그 욕망조차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청춘은 언제나 가능성과 희망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를 정면으로 고발한다. 특히 마약 중독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렌튼의 여러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청춘이기에 뭐든 가능하다’는 식의 희망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깨닫는다. 이 영화는 청춘을 특별히 미화하지도, 극단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저 있는 그대로, 잔혹하지만 진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나온 혹은 지나고 있는 청춘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선택의 아이러니: 자유 혹은 현실
렌튼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대사, “Choose life. Choose a job. Choose a career. Choose a family…”는 단지 재치 있는 오프닝이 아니다. 이는 당시 영국 사회가 강요하던 청년의 ‘표준 인생 경로’를 나열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대한 조소와 거부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것들이 사실 얼마나 정형화된 궤도 위에 놓여 있는지를 환기시키며, 렌튼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과연 진정한 자유를 얻었을까?
영화는 선택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선택을 하지 않는 삶이 진정한 자유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더 얽매는 굴레일까? 렌튼은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약에 중독된 나날, 배신과 죽음, 끝없는 무기력이다. 어쩌면 그는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마저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렌튼은 극 후반, 큰돈을 손에 넣고 동료들을 배신한 채 떠난다. 그리고 다시 그 유명한 내레이션을 되풀이한다.
“나는 삶을 선택하겠다. 직장을 갖고, 자동차를 사고, 가족을 꾸리고, 텔레비전을 보며 살아가겠다.” 이 말은 처음의 반항적인 선언과는 대조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진심일까, 아니면 또 다른 체념일까? 청춘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든, 외부 강요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렌튼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절망을 겪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선택은 단지 적응이 아닌 생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이 영화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때론 선택하지 않음이 더 큰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렌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여러 갈림길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책임의식으로 결정을 내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그림자: 청춘의 끝에서 남는 것
트레인스포팅은 청춘의 열정이나 이상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청춘의 뒤편, 그 열정이 다 식고 난 뒤 남는 진공과 같은 공허함을 이야기한다. 렌튼과 그의 친구들은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하고, 삶을 갈구하는 이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삶에는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웃고, 울고, 사랑하고, 죽는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빠르게 지나가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결국엔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쓸쓸히 사라진다. 현실은 냉혹하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하층 계급 출신이며, 교육이나 직업의 기회도 제한되어 있다. 영국의 구조적 빈곤과 계급 문제는 이들의 선택지를 단 몇 개로 좁혀버린다. 그 안에서 마약은 유일한 탈출구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결국 현실은 다시 그들을 끌어당기고, 말라버린 감정만을 남긴 채 모든 것을 소모시킨다. 토미의 죽음은 그 상징적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비교적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인물이었지만, 마약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사랑하던 여인과의 이별, 렌튼의 배신, 친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죽음을 맞는다. 그의 방에 홀로 남겨진 고양이, 텅 빈 사진 속 추억들은 잔인하리만큼 현실의 잿빛을 보여준다.
렌튼이 마지막으로 돈을 들고 떠나는 장면은 어찌 보면 일종의 자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엔 묘한 공허함이 감돈다. 그는 결국 친구들을 등지고, 기성세대가 말하는 '정상'의 삶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가 원하던 삶일까? 아니면 세상에 굴복한 또 하나의 청춘일 뿐일까? 청춘의 끝은 반드시 희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끝에서 마주하는 건,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현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현실조차 결국 우리가 품어야 할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된다. 트레인스포팅은 바로 그 순간을, 그 인정의 순간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준다.
트레인스포팅은 자극적인 영화이지만, 그 자극은 단지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혼란과 공허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선택은 과연 자유인가? 현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을 오롯이 우리 몫으로 남긴다.
청춘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종종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트레인스포팅은 바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우리 삶을 다시 정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